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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1호 숭례문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겨보고 그 건축물에 있는 특징과 구조, 사건사고에서도 다시 복원되는 과정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역사의 현장을 돌아본다.

    1. 숭례문의 역사적 의의

    숭례문은 서울의 남대문 광장에 위치한 조선 도성의 남쪽 정문으로, 서울의 상징이자 규모가 가장 크며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입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성종 10년(1479)에 대규모 보수공사를 거쳐 오랜 세월 동안 한성의 대문으로 기능했습니다. 1907년에는 일제의 군대 해산령으로 전투의 장소가 되었으며, 일본 황태자의 방한 시에는 황태자의 지나감을 거부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2. 숭례문의 건축적 특징과 구조

    숭례문은 조선 도성의 남쪽 정문으로, 견고한 육축 위에 전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가진 대형 성문입니다. 흥인지문이나 팔달문과 함께 국내에 남아있는 성문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 성문은 흥인문과는 양식의 차이로 구분되는데, 숭례문은 조선 전기 양식을 대표하며 흥인문은 조선 후기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숭례문은 전반적으로 소박하면서도 굵고 건실한 장식으로 조선 초기 양식을 잘 대표하고 있습니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2층 잡상의 개수는 9개이고, 1층 잡상의 개수는 7개입니다.

    1961년 ~ 1963년의 보수 작업에서 복원된 단청은 당시에 발견된 옛날 패턴을 참고하여 채색된 버전에 가깝게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쳐 단청을 다시 칠하면서 문양이 변해간 것으로, 원본이 어느 것인지는 무의미한 측면이 있습니다. 2010년 복원 시에는 숭례문의 원래 기단이 현재 지면보다 1m 60cm 정도 낮았음이 발견되었으며, 조선 초 중기의 도로는 현재보다 낮았고 성벽은 더 높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최근 복원된 창경궁 명정문의 단청과 비교하면 조선 초 단청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숭례문의 역사적인 변천과 보존

    숭례문은 시간이 흘러 다양한 사건과 전쟁으로 인해 훼손되었으나, 여러 차례의 복원 작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2006년에는 성곽이 헐리면서 연결된 성곽 없이 남아 있었으나, 2006년 복원 공사를 통해 원래의 모습이 재현되었습니다. 2008년에는 화재로 인해 피해를 입었지만, 2013년에 복구 공사를 거쳐 다시 공개되었습니다. 숭례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구조는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양녕대군이 편액을 썼다는 역사적 가치도 가지고 있습니다.

    복원된 숭례문의 모습